인천채씨의 기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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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4회 작성일 23-12-1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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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다의당 기리는 의현사 마련

 

채귀하가 벽란진을 건너 다다른 곳은 수양산 줄기인 평산의 목단산(牧丹山)이었다. 정확한 주소지는 황해도 연백군 목단면 아현리 다의현이다. 채귀하가 다의당이란 호를 가진 것도 이 지명에서 유래됐다. 그런데 채귀하보다 목단산에 먼저 들어와 살던 이가 있었는데, 그가 목은 이색(李穡)이다. 이색은 목단산의 서쪽 탁영대에, 동쪽 배록동에는 신황의(申黃衣)가, 가운데 다의현에 채귀하가 살았다. 채귀하는 이곳에 머물며 이색과 시문을 주고받았는데, 이색에게 보낸 글귀 중에 “망국의 한을 품은 몸이 죽지 않고 다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는 다의현에서 송경(松京·개성)을 바라보며 이렇게 읊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산막에서 대사립 달아놓고 멀리 송악을 바라보니 저문 구름 어둡구나 가을 바람에 궁궐 터는 기장 밭이 된 듯하여 예로부터 외로운 신하는 눈물만 흘리네.”

 

채귀하는 목단산 다의현에서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던 모습을 그린 채미도(採薇圖)를 보면서 절의를 지키다 생을 마쳤다. 그리고 목단면 의현리 불곡산에 묻혔다.채귀하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두문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맏아들 영(泳)은 고향에 돌아가서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고려 임금을 받들라 했고, 둘째 부(浮)는 평양으로 가서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살라 했고, 셋째 동양(東陽)과 넷째 명양(明陽)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맏아들 채영(蔡泳)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향 마을인 대구시 후동에서 얼마간 떨어진 팔공산 자락 미대동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인천군 채수를 배출하고 경상북도 인천 채씨의 맥을 형성하게 됐다.

남북 분단이 길어지면서 다의당의 묘소를 오래도록 찾지 못하게 된 인천 채씨 문중에서는 1982년 삼한시대에 축조된 대구 북구 검단동 검단토성 안에 다의당을 기리는 의현사(義峴祠)를 마련했다.  그리고 대구시 서변동 채영의 묘소 위쪽에 단소(壇所)를 만들어 시조를 모시고 있다. 두문동 72현의 절개가 한 집안의 뼈대가 되고, 자부심이 되어 600년을 치달려온 뒤 대구 땅에 맺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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