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대하여! -채한옥 종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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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1회 작성일 23-12-1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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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8년경 고구려건국의 주역인 주몽의 부인 소서노는 북부여에서 주몽이 탈출하기 전 예소야 라는 전부인에게서 낳은 유리왕자가 찾아와서

 

태자가 되자 소서노는 본인이 낳은 비류. 온조 형제와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오다 큰아들 비류는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다 도읍을 정하고 동생 온조는 지금의 서울인 하남에다 도읍을 하여 백제 700 년 역사의 터전이 되었으며,

현대사 에서는 우리나라 공업 기술의 인제를 양성하여 산업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하 공대가 인천의 인.자와 하와이의 하. 자를 따서 지은 이듦입니다 내용인즉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술인력을 길러내 낼 학교를 지어야하는데 돈이 없으니 망명시절 하와이에 이주한 교민자녀들 교육을 위해 지었던 교민 학교를 팔은 돈과 교민들의 후원금을 모아 인천에다 공대를 지어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후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입국으로 성공 할 수 있는 터전을 다진 것입니다.

 

인천(仁川)은 경기도 중서부, 경기만(京畿灣)에 돌출한 반도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매소홀현(買召縣)이라 칭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경덕왕 때 소성(邵城)으로 개칭, 율진군(栗津郡 : 지금의 시흥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현종 9) 수주(樹州)에 속하였으며 숙종때 경원군(慶源郡), 인종때 인주(仁州), 1390년(공양왕 2)에 경원부(慶源府)로 계속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2년(태조 원년) 인주로 환원, 1413년(태종 13)에 인천군(仁川郡)이 되었으며, 1460년(세조 6)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으나 1688년(숙종 14)에는 현으로 강등, 1698년 다시 부로 환원하였다. 1914년 인천의 관할구역이 구(舊)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인천항의 신시가지로 축소되고 구(舊) 인천읍과 부평이 통합되어 부천군(富川郡)이 되었다.

1949년 인천시(仁川市)로 개칭되고 1963년 부천군 작약도(芍藥島)를 편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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